조르바의 해변



우문우답 혹은 현문우답

 좌파와 우파는 사회경제적인 입장이 어떠하냐에 따라 갈린다. 자본의 증식보다 분배에 관심을 갖거나 자본가보다 노동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좌파고, 반대는 우파다. 자본의 분배보다 증식을 우선하고 노동자보다 자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체제가 자본주의이고 대부분의 나라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만큼, 좌파는 체제를 바꾸려들 수밖에 없다. 좌파가 체제를 지키려는 보수가 아닌 진보가 되는 이유다. 그래서 보통 진보는 좌파와 동의어로 쓰인다.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는 이런 사회경제적인 입장 뿐 아니라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로 갈리기도 한다. 과거 북한이 내세웠던 체제가 사회경제적으로 좌파의 입장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의 실상이 좌파의 사회경제적 이상향과 다르다는 것은 이미 예전에 밝혀졌다.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북한을 사회경제적 이상향으로 믿었던 사람들을 NL이라 불렀고, 그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북한을 이상향으로 믿는 사람들은 현재 종북주의자라고 부른다(대북관계에서 대화를 중요시하는 것과 종북은 다르다). 즉 당시 NL은 진보의 사회경제적 입장에 포섭될 수 있었지만 현재 종북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결국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엄밀히 말해서 사회경제적으로 진보냐 보수냐와는 무관하다.

 이정희 민노당 대표에게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침묵하고도 진정한 진보냐고 묻는 경향신문의 사설은 그래서 우문이고,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자신들의 입장이라고 말하면서 진보를 운운한 이 대표의 대답은 그래서 우답이다. 특히 이 대표의 대답이 우답인 것은 그의 반박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가 말하는 3대 세습에 대한 침묵의 이유인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이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 등은 말 그대로 이 땅의 평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진보와 보수는 평화를 좋아하고 말고로 나뉘지 않는다.

 혹 경향신문이 사설에서 진보를 언급한 이유가 '민노당은 진보정당이라기보다 종북정당'이라고 말하고 싶어서일 수 있다. 이 대표가 일전에 법원에서 주장한 '진보를 택할 권리'도 실은 '주체사상을 택할 권리'라는 얘기로써 말이다(물론 주체사상을 택할 권리도 있는 것이 민주주의사회고 경향신문도 그걸 문제 삼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면 경향신문은 민노당에게 진정한 진보(사회경제적 입장으로써)를 요구한 것이고, 이 대표는 민노당과 자신의 (사회경제적 입장으로써)진보에 대해선 답을 회피했거나 경향신문의 문제제기를 이해하지 못한 셈이 된다. 이 경우엔 현문우답이다.


"어린이들을 잘 부탁하오"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100년 편지'에 실린 글.
'소파 방정환 선생이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http://www.korea100.org/tc/31

공정사회라는 구호

 배우 엄지원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맡은 배역은 동시통역사와 영어강사다. 그만큼 영어를 잘한다. 그가 최근에 와서 이러한 배역을 맡은 이유는 영어를 잘하게 된 때가 최근이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동안 영어공부를 조금씩,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지금은 동시통역사와 영어강사만큼의 실력을 갖췄다. 얼마 전 세계적인 배우 소피 마르소가 방한했을 때 인터뷰를 했던 사람도 그다. 그러나 엄지원은 외교부에서는 일할 수 없다. 외교부의 특별채용 자격인 ‘초등학교를 포함해서 6년 이상의 외국 체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공정한 사회가 아닌 이유는 외교부 장관이 딸을 특별채용해서가 아니다. 한 아버지의 그릇된 자식사랑이 빚은 편법 혹은 위법 행위로 사회 전체의 공정성을 말할 수는 없다. 그 아버지가 고위관료이고, 그러한 고위관료 아버지들이 많다면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문제다.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떨어뜨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투명성이다.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외교부의 특별채용 자격처럼 조금씩, 꾸준히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자격이 경쟁에서 승리하는데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나 승리할 기회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쟁도, 실은 그 필수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의 경쟁이라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떨어뜨린다. 영어를 잘하는 고학력자가 넘치는데도 장관의 딸과 장관의 딸에 밀린 다섯 명까지, 여섯 명이서만 경쟁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외교부의 특별채용처럼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주는 대놓고 공정하지 않은 경쟁은 드물다. 대부분의 경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있다. 문제는 경쟁에 참여할 기회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쟁의 결과는 외교부의 특별채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예컨대 수학능력시험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능이라는 경쟁의 승리자인 서울 명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다수는 특목고나 강남 8학군 출신이다. 특목고는 다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이 가고, 강남 8학군의 학교는 강남에 사는 학생들만이 갈 수 있다. 비싼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나 강남 8학군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능력은 학생이 조금씩, 꾸준히 노력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 있고, 힘 있어서 실력이 있는 사람 대신 돈 없고, 힘 없어서 실력이 없는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해야 공정한 사회라는 얘기가 아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이 실력까지 없는 이유가 돈이 없고 힘이 없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돈 없고, 힘 없는 사람일지라도 노력에 따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그 실력으로만 겨루는 경쟁이 있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된 ‘공정사회’라는 구호 뒤에 따라올, 따라와야 할 정책은 그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정책이어야 한다. ‘초등학교를 포함해서 6년 이상의 외국 체류 경험’처럼 능력과 상관없는 사회 각계의 진입장벽을 없애는 정책이나, 공교육만 받은 학생이 서울 명문대에 갈 수 있게 만드는 정책들이 구호 뒤에 따라와야 한다.

 그 와중에 대통령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사회가 공정사회”라고 말했다. 청와대와 여권은 외교부 장관을 경질함으로써 공정사회의 기틀을 닦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거나 보지 않는 것인가. 청와대와 여권은 이미 불공정한 현실에 편법 혹은 위법 행위를 통해 공직사회의 부정부패라는 혹을 하나 더한 사람을 처벌하는 일이 공정사회의 기틀을 닦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인가. 그렇다면 공정사회는 대통령의 선창으로 시작돼서 청와대와 여권의 제창으로 끝나는 구호로만 머물 것이다.


인포데믹스

 오델로는 간신 이아고에 속아 아내 데스데모나와 심복 카시오의 관계를 의심한다. 셰익스피어의 ‘오델로’는 오델로가 의심 끝에 결국 죄 없는 아내와 심복을 죽이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오델로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부정망상’은 이처럼 질투 따위에 눈이 멀어 사실을 보지 못하고 의심을 굳혀가는 증상이다. 이 증상에 걸리면 ‘공기처럼 가벼운 것도 성서처럼 무거운 증거’로 여겨 의심을 이어간다.

 광우병 파동을 거쳐 세종시 정국,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의혹까지, 대한민국은 부정망상을 앓고 있는 듯하다. 광우병의 발병인자에 한국인이 유독 약한 것은 아니라는 연구결과와 세종시 수정안, 어뢰 파편에 남아있는 ‘1번’을 분명 우리는 믿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우리에게 ‘부정망상’이라는 진단을 내리기 전에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데스데모나는 과연 무죄였는가.

 1980년 5월의 한국인들은 1980년 5월의 광주가 어땠는지를 알지 못했다. 정부가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광주에 폭도 발생’이라는 정부가 말하는 또 다른 사실에 묻혔다. 북한이 보낸, 혹은 북한에 매수된 간첩이라는 사법부가 말하는 사실에 청년들은 인혁당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고, 지식인들은 동백림 사건으로 나라를 잃었다. 정부의 공식발표와 사법부의 판결은 사실만을 담고 있어야 하며, 사실만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국민의 믿음이 깨지게 된 데에는 이렇듯 역사가 있다. 우리의 이러한 역사는 다른 어떤 나라의 그러한 역사보다 가깝고 확실하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다르다. 이제는 반정부 운동을 했다고 해도 정부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을뿐더러, 겨누고선 겨누지 않았다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정부가 여전히 또 다른 거짓을 말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도래하고 인터넷이 망을 넓혀도 미국과의 FTA 협상에 대한 발표는 사실과 달랐고, 천안함이 침몰한 시간은 계속 바뀌었다. 청문회는 고위관료들의 거짓말 경연장이 된지 오래다. 공기처럼 가벼운 것이 아닌 성서처럼 무거운 증거를 만들어 왔고, 만들어내는 정부라는 우리의 데스데모나는 예나 지금이나 결코 깨끗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국민이 그러한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은 부정망상이 아니라 경험칙이다.

 경험칙은 어떻게 깨지는가. 반복되는 어떤 경험에 의해 생겨난 기존의 법칙은, 반복되는 다른 경험에 의해 생겨나는 새로운 법칙에 깨진다.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주장으로 여겨지는 우리의 현실은, ‘사실’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서 우리에게 꾸준히 다가올 때 바뀐다. 지금의 인포데믹스를 불러온 장본인이 나서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부정망상을 앓고 있는 환자로 국민을 대할 때가 아니다.


무상급식과 짬밥

 신체 건강한 젊은이가 군대에 가야하는 이유는 나라를 위해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여덟 살 꼬마가 초등학교에 가야하고, 6년 뒤에 중학교에 가야하는 이유도 나라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다. 우리가 힘들게 공부해서 얻은 지식이나 부는 우리의 몫이지 나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사회의 부조리를 찾아내고, 부자는 사회의 부를 늘린다. 아무리 사회에 관심이 없는 지식인일지라도 제 밥그릇과 관련된 사회의 부조리마저 못 본체 하지는 않을 것이며, 아무리 구두쇠인 부자일지라도 세금마저 안 낼 수는 없다. 교육이 나라를 위해 국민이 해야 하는 ‘4대 의무’에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학교에 가려는데 학교가 없다면 우리는 의무를 다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나라가 학교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고, 학교를 만드는 것이 나라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무가 나라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는 국민이 4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 이것은 의무이지 복지가 아니다. 이것을 복지라 부르면 국민의 4대 의무도 국민이 나라를 위해 베푸는 ‘4대 시혜’가 된다.

 때문에 나라는 국민이 교육이라는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학교를 만들고 선생님을 모셔 와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나라의 의무에 왜 급식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군대가 군인에게 무료로 밥을 주는 이유와 같다. 군대에서 식사를 거른 군인을 전투력 저하를 야기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군대가 군인에게 무료로 밥을 주는 이유는 군인이 먹는 밥이 국방이라는 의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학생이 먹는 밥도 그렇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급훈으로 걸려 있는 교실이 많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학생이 먹는 밥은 그들이 교육이라는 의무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나라의 의무인 무상급식이 차등시행이 아닌 전면시행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부잣집 아이들의 급식비를 아껴서 다른 일에 효율적으로 써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의무에는 효율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신체 허약한 젊은이도 군대에 보내며,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신체 허약한 젊은이가 총검술을 하는 일이나 공부가 적성이 아닌 아이에게 국영수를 가르치는 일이 효율 면에서는 떨어지더라도 그들이 나라를 지키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효율을 말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의무교육을 받는, 교육이라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든 아이에게 밥을 주는 일은 나라의 의무다. 이를 두고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 복지니 하는 것은 ‘짬밥’을 나라가 베푸는 복지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나라의 나태를 눈감아 주는 것과 다름없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일과 복지를 덜 베푸는 일은 다르고, 부잣집 아이나 그렇지 않은 집의 아이나 교육이라는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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